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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을 제대로 표현 못해 답답해하는 백성을 위해 누구나 소리 나는 대로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우리 말소리를 가장 잘 표현할 글이 있어 세계 최저 문맹률을 자랑하며 디지털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글쓴이: 박범순(Adam Park)

며칠 전 한글날을 처음으로 해외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공업과 기술이 발전한 나라, 독일 출장 중에 맞이한 한글날이라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우리글에 관해 깊은 생각이 들더군요. 출장길에도 변함 없이 스토리허브에 글을 올립니다.

한글이 정보기술?

한글을 우리 고유의 정보기술이라고 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보기술 혹은 정보통신기술은 비교적 최근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라 그렇습니다. 전기와 컴퓨터 혹은 컴퓨팅 기기를 이용해 디지털 데이터를 만들고 보관하고 수정하고 전달하고 연결하는 등의 활동을 지원하는 디지털 기술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정보기술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기억하고 싶거나 전달하고 싶은 내용, 오래두고 보관하고 싶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보관하는 기술이 바로 정보기술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사시대에 커다란 사냥감을 잡아와서 온 부족이 나눠 먹은 이야기를 기록한 동굴 벽화도 고대의 정보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관과 전달의 저울질

세상 일은 때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리합니다. 정보기술도 마찬가지죠. 선사시대 동굴 벽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보관하는 정보기술입니다. 이에 비해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는 정보를 빨리 널리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정보통신기술입니다.

과거의 기술은 이처럼 용도에 따라 오래도록 기록하고 보관하는 데 강한 기술, 신속한 정보 전달에 용이한 기술로 나뉩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의 기록과 전달 모두 갈수록 경제성이 커져 굳이 어느 한 쪽을 포기하지 않고도 정보 저장과 전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죠. 한글은 누구나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관과 전달 능력을 두루 갖춘 디지털 시대의 정보통신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닮은 한글

한글은 선사시대 동굴 벽화나 봉화와 같이 어느 한 가지 용도에 특화된 기술이 아닙니다. 한글은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기록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떠오른 생각을 오래도록 두고 볼 수 있도록 보관하는 능력이 탁월하죠. 또한 기록한 내용을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보기술은 쓰기 편해야 널리 확산됩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께서는 한글 사용자 매뉴얼도 만드셨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바로 한글 매뉴얼입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이 바로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세종대왕은 자신이 만든 한글이 소리나는 대로 다양한 말을 표현할 수 있고 한자보다 훨씬 쉬워서 똑똑한 사람은 하루,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워 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종대왕: 하루만에 한글을 익힐 수 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 팀이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글을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더니 대부분이 하루 이틀에서 2주 정도에 익혔다고 밝힙니다. 물론 한 달 넘게 걸린 사람도 있었죠. 한글을 익히기 쉬운 이유는 세종대왕이라는 한 사람의 발명가가 논리적인 쳬게에 맞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음은 혀와 입술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기준으로 만들어 소리내는 방식과 소리를 연결지어 보면 그 모양만 봐도 어떤 소리를 낼 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한글 모음을 가르쳐 주고 이름도 한글로 써줍니다. 특히 모음의 단순명료함에 감탄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점)땅(가로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세로선)을 기준으로 을 더해 밝고 가벼운 소리와 어둡고 무거운 소리를 표현합니다. 예컨대 땅 위에 해가 떠 있으니 밝은 낮처럼 밝은 소리(오, 요)가 나고 지평선 너머로 해가 졌으니 우, 유는 오, 요보다 어둡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 식입니다.

한글과 정보기술 활용의 미래

억울하게 잡혀와도 그 억울함을 제대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답답해하는 백성들을 위해 누구나 소리 나는 대로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우리 민족의 말소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이 있었기에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자랑하며 이미 디지털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정보통신기술을 이야기 할 때 5G 같은 통신속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편하게 널리 이롭게 만들고 싶어한 세종대왕의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글은 그야말로 사람을 향하고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정보기술입니다. 한글과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고 드라마와 영화를 만들어 한류를 전파하는 일은 좋은 시작이죠.

디지털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기준으로 더 나은 기술, 누구나 차별 없이 쉽게 쓸 수 있는 기술이라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만든 세종대왕처럼 복잡한 기술일수록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만드는 배려가 있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듭니다. 고맙습니다.